살사 칼럼

국내살사 초창기를 듣다 - 1. 매직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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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0월 셋째 주엔 ‘살사 10주년 파티’가 예정되어 있다. 이 행사의 주관자는 국내 살사 1세대인 ‘매직킴’(김민수)이다. 그는 1996년말 국내에 첫 살사가 보급될 시기부터 현재까지 모든 것을 보고 참여한 명실상부한 한국 살사계의 산 증인이다. 국내 살사가 처음 보급되었던 그 시기의 생생한 이야기를 이제부터 그에게 들어보고자 한다.

초창기 인식은 살사=카바레춤

살사를 처음 배우다 보면 막연히 드는 의문이 있다. ‘국내에 살사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언제일까?’ 매직킴에 따르면(초창기에 살사를 접한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96년에서 97년초 사이라고 한다. “당시엔 1주일에 한번씩 살사를 췄었다. 당시 홍대 보스톤에서 금, 토일에 살사 행사를 시작했다. 마콘도가 생긴 것은 97년 5월부터”라고.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매직킴은 원래 살사를 배우기 위해 살사를 췄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살사보다는 ‘영어’가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춤을 추다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본래의 목적은 망각하고 살사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살사를 추기란 당시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70131004353.jpg일단 당시엔 ‘살사’라는 타이틀을 걸고 동호회를 만들 수 없었다. 1990년대 후반기엔 ‘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살사라는 춤은 '캬바레에서 이른바 제비들이 추는 춤'으로 오해받기가 십상이었다. 그래서 당시 하이텔 같은 PC통신에선 아예 모임개설 자체를 불허했다. 그래서 초창기엔 동호회가 존재할 수 없었다. 나우누리에 ‘사이버라틴’이란 동호회가 있었고, 거기서 매직킴에게 살사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이 와서 ‘로꼬스’라는 소모임을 만든 것이 최초였다. 이후 넷츠고가 생긴 다음 ‘맘보·플라멩고와 영어를’이란 교육적인 타이틀을 내걸고 간신히 살사관련 소모임을 만들 수 있었다.

“당시엔 춤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아서, 내가 야후에 ‘살사’라는 카테고리를 만드는 데도 수십 번 요청해서 간신히 만들어 질 정도였다. 사이버라틴에서 로꼬스가 만들어진 이후에 ‘단사스’, ‘단사링’이란 소모임을 만들면서 조금씩 살사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사이버라틴 로꼬스의 초창기 멤버들은 아쉽게도 현역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없다. 대부분 자신의 현직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

국내 살사를 보급·정착시킨 사람은?

“국내에 살사를 보급시키는데 앞장선 이들로는 존, 케리, 재경씨를 꼽을 수 있어요. 이중에서 존과 케리는 외국인이고, 재경씨만 한국인이랍니다. 이들이 우리나라에 살사를 보급시킨 장본인들이죠.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살사를 국내에 보급시켰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아니랍니다. 날짜를 따져 봐도 그렇고, 실제로 가르치거나 행사를 주관한 사람이 바로 이들이거든요.”

당시 유명했던 국내외 댄서

“국내 댄서로는 제임스, 일레인, 혜선씨를 꼽을 수 있습니다. 외국 댄서로는 뉴욕의 에디 또레스, LA의 조시엔 네글리아 밖에 몰랐어요. 왜냐구요? 내가 비디오를 가져온 사람이 이 둘 밖에 없었거든요.”

다소 농담 같이 들리는 이야기지만, 당시엔 지금처럼 인터넷이 대중화 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래서 대중이 외국 댄서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것이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목마른 대중에게 에디 또레스와 조시엔 네글리아의 비디오 테잎을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매직킴이었다. 그리고 2000년도에 매직킴은 국내에서 두번째로 살사 비디오를 찍었는데, 상대 살세라는 가면을 쓰고 촬영에 임했다. 당시 살세라는 국내 저명한 대학의 교수였다. 만약 살사를 춘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파면당할 수 있기 때문에, 부득이한 보신책이었던 셈. 당시 살사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씁쓸한 대목이다.

어떻게 살사를 보급 시킬 것인가? - 살사 1세대의 고민과 노력

1990년 말, 국내에서 춤에 대한 인식은 주부가 장바구니를 들고 카바레에서 제비들과 춤을 추는 게 전부였다. 매직킴은 이런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일부러 신문 잡지와 방송 매체에 자주 출연했다. 혹여라도 나이 지극한 사람들이 살사를 배우면 그런 상황이 살사에도 벌어질 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당시엔 20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20대 후반이 배우는 격렬한 춤이다’라고 소개했다. 그 후엔 내가 30대가 되어선 ‘30대 초반이 배우는 다소 격렬한 춤이다’라고 소개했다. 매체에 나가고 나선 3년 정도 한의원 문을 닫았는데, 이유는 환자들이 ‘여기 원장은 춤바람 난 몹쓸 인간이다’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카바레에선 맘보를 제비들이 춰서 고민을 많이 하기도 했다.”

‘살사를 어떻게 보급시킬까?’는 당시 살사 1세대들의 가장 큰 고민이자 화두였다. 그리고 그 방법 중에 하나로 실력과 명망을 갖춘 외국 댄서를 초청해서 워크샵을 갖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혜선씨. 그녀는 지금도 명망이 자자한 이디를 불러와서 성공적인 워크샵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매직킴은 알렉스를 초청해서 워크샵을 가졌다. 지금에야 외국 댄서를 초청한 워크샵이 많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것은 모험이었다. 지금처럼 살사를 배우려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인식도 좋지 않았던 때. 따라서 많은 돈과 시간이 헛되이 돌아갈 수도 있었다. 애초에 그런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살사 초창기는 문나이트파 VS 보스톤파

‘서태지와 아이들’을 기억하는가? 그들이 갔던 유명한 클럽 중에 문나이트가 있었다. 그곳에서 금·토일에 살사를 췄었다. 당시 문나이트에서 유명했던 스타일은 아메리칸 스타일. 보스톤은 콜롬비아 스타일이 유행했다. 콜롬비아 스타일은 ‘느낌’을 중요시 여기고, 남녀가 붙어 추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 아메리칸 스타일은 남녀가 일정 간격이상 띄어서 추고 기교가 많이 부렸다. 그래서 매직킴을 비롯한 1세대들은 아메리칸 스타일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카바레춤’이나 ‘퇴폐적인’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말 많이 고민했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나 여건을 보았을 때 아메리칸 스타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나라의 살사는 공연용으로 보기 좋고, 10년이란 짧은 역사에 비춰보았을 때, 기교를 감안한 부분에서 아시아 제일을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적으로 이웃 일본은 ‘콜롬비아 스타일’을 채택했다. 때문에 기교는 우리보다 떨어지지만, ‘느낌’적인 면에선 우리보다 낫다.”

20070131004417.jpg국내 살사의 변질 그리고 역사

살사에 국내에 보급된지 어느덧 10년. 이제 제법 규모가 큰 파티나 공연이 자주 개최된다. 그리고 동원인원은 최소 300~400명에서 천명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서 ‘돈’과 관련된 안 좋은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만약 ‘A'라는 곳에서 모두가 행사를 진행하길 원했는데, 대표나 진행자가 갑자기 ’B'로 바꾼다면 이것은 누가 보아도 커미션을 받은 것이다. 국내 살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런 일이 많아지고 있다. 동호회 규모가 커지면서 이익을 노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만약 살사를 업으로 삼는 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하지만 업이 아님에도 욕심을 내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부산에 거주했는데, 어느 부산쪽에 위치한 동호회에서 정리한 부산 살사 역사를 보니 모든 것을 자기 동호회을 중심으로 놓고 정리했다. 거기엔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많이 것이 달랐다. 요즘 살사를 추는 사람들은 살사 초창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태반이다, 그래서 내가 준비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바로 살사박물관과 10월 셋째 주에 예정인 ‘살사 10주년 파티’다.”

매직킴에 따르면 살사박물관은 멀티가 먼저 제안해서 함께 진행 중이며, 현재까지 그가 지녔던 모든 자료는 멀티에게 일단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살사 10주년 파티’의 경우, 홍보를 위한 세장의 포스터가 준비 중이다. 거기엔 초창기 살사의 산 증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넣을 계획이다.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사람들이 당시 활약했는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게 매직킴의 생각이다.

“내가 10주년 파티를 준비하니 사람들이 ‘매직킴이 오거나이저로 나설려고 한다’라고 말하던데, 전혀 그럴 생각은 없다. 장담컨대 난 이 행사만 진행하고 앞으로 5년 동안 어떤 행사도 주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5년 후엔 ‘15주년 행사’를 진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5년 동안 분명 많은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10주년 행사’를 통해 매직킴이 얻을 수익이란 없다. 그는 이 행사를 후원 없이 진행시킬 계획이다. 모든 것은 자비로 할 계획이다. 음악을 연주할 밴드부터 장소 대관료, 부대 행사 비용을 스스로 책임질 생각이다. 혹시라도 후원을 받았다가 그가 생각했던 역사 정립에 흠집이 생길까 염려하는 탓이다.

“역사를 정리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과 일본은 살사에 대한 역사를 정리할 수가 없다. 중국은 누구도 정확하게 말할 수 없고, 일본은 살사 1세대인 인물이 모든 것을 자기가 했다고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역사를 분명히 하고 싶다. 그렇게 할 때만이 앞으로 우리 나라의 살사가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사계에서 은퇴한 것은 2001년 5월

사람은 자신이 떠날 때를 알아야 한다. 말하기는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국내에서 살사 대중화에 앞장서던 매직킴에겐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바로 LA살사 콩그레스에 출연하는 것이었다. 매직킴은 1999년 말부터 2000년 까지 세계를 돌아다녀본 결과, 살사 관련 행사 중에 LA 콩그레스가 가장 커보였다. 대회에 나가고 싶었던 매직킴은 알버트 또레스에게 메일과 국제 전화를 걸었고, 결국엔 미국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결국 2001년 5월 LA 살사 콩그레스에서 한국인 최초로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그길로 바로 미련 없이 은퇴했다. 그 후론 제주도와 중국을 돌아다녔다. 그가 우리나라로 돌아온 것은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누구에게나 전성기가 있고, 은퇴해야 할 시기가 반드시 온다. 추하지 않으려면 떠날 때 떠날 줄 알아야 한다. 난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말한다. 내가 은퇴한 시기는 2001년 5월이라고.”

비록 일선에선 물러났지만, 매직킴은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는 살사를 너무나 좋아해서 결국 자신의 일자리를 서울 근처로 옮겼다. 그리고 현재도 SDA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밝힌 것처럼 살사박물관 건립과 10주년 파티 준비를 위해 노력 중이다. 자신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까지 아낌없이 바치면서 국내 살사를 위한 헌신한 매직킴. 이런 이들의 값진 노력이 오늘날 우리가 즐겁게 살사를 춘 밑거름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참고로 올해가 국내 살사 10주년이 되는 까닭은 일주일 내내 살사를 즐기기 된 1997년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취재=심보선 기자(주작) magniten@paran.com

사진=김용한 기자(해리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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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5414☞젝슨☜님의 댓글

라틴미디어(구 라틴24) 의 주작형님취재 , 해리포터형의 사진 ... 을 퍼왔습니다  요즘 1세대분들이 인기라... ㅋ 자료는 좀 된것같아요...

예쁜늑대(서울)님의 댓글

선생님에 대한 글이네요.. 통통한 에디 아저씨와 썍쉬한 조시언니 비디오.. 참 닮도록 봤었는데..ㅋㅋ.. 결국 원원스텝에 에디 아저씨의 패턴이 결합한 형태로 많이 춘 기억이 나네요..

제이슨(로사)님의 댓글

콜롬비아 스타일은 ‘느낌’을 중요시 여기고, 남녀가 붙어 추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 아메리칸 스타일은 남녀가 일정 간격이상 띄어서 추고 기교가 많이 부렸다. 그래서 매직킴을 비롯한 1세대들은 아메리칸 스타일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카바레춤’이나 ‘퇴폐적인’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말 많이 고민했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나 여건을 보았을 때 아메리칸 스타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나라의 살사는 공연용으로 보기 좋고, 10년이란 짧은 역사에 비춰보았을 때, 기교를 감안한 부분에서 아시아 제일을 표방할 수 있게 되었다.,,,,(그대로 복사인용한부분,,)

제이슨(로사)님의 댓글

매직킴님이 왜 화려한 LA (기사에서 아메리칸)스타일을 고수한지를 이제야 알게되었네요,,,정말 공감이 가는군요,,10년이나 지난 지금에야,,참,,, 1세대가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으나 알아주는이는 별로없고,, ,,안타깝습니다,, 언제나 우연히 만나면 편하게 인사하고 반가워하죠,, 동갑이지만 언제나 스승과 제자로만 존칭을씁니다,, 당시에 제임스님과의 스타일의 차이로 여러 구설수도 있었던것으로 압니다,,각기 나름대로 폄하했지요,, 그것이 한국사회에 살사를 보급하기 위한 고민의 일환이었다니,,남일이 아니군요,, 많은걸 느끼게 하는군요,,

alandelon님의 댓글

초창기 살사를 즐기던 분들은 여러분 계셨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살사를 전한 분들은 혜선 매직킴 제임스 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잡지에 인터뷰도 하고방송에도 나가고 나름대로 인터넷뒤져서 정보도 제공하고 적자도 감수하면서 엘에이에서 댄서들 초대해서 웤샾도 하고....미국 살사강사들에게 잘알려져 있는 사람은 스핀님이지요. 월드 살사 심사위원으로 앉아있는거 보고 당시에 깜작 놀랐어요. 자랑스러운 일이지요.  네분 말고도 많은 분들이 살사발전에 이바지하였지만  시간상 다 열거할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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