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원 온투에 대한 단상 (스크롤 압박 있습니다.)
본문
어느덧 춤판에 투신한지 6년이 넘어, 7년에 육박해 가네요.
그동안 이제 겨우 만 5년 채워서 6년차 넘어갔다 생각했는데...
자세히 계산해 보니 6년을 한참 넘었더라구요. --;;
온투를 접한 것은 살사 시작한지 만 1년이 갓 넘었을 때...
우연한 기회에 서울을 오가며 온투 웍샵을 듣고 베이직과 CBL, 턴 정도를 배웠죠.
그리고 나름 열심히 온투 베이직도 연습했습니다.
제가 원래 온원 배울 때도 베이직에 한해서는 연습벌레였거든요.
(연습을 딱히 좋아해서라기보다, 원체 몸치여서... 당연히 연습 죽어라 해야 한다는 말을 고지식하게 받아들여서입니다.)
하지만 그땐 온투를 도대체 왜 추는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온투 추는 사람이 극소수는 있었지만
그들이 춤 추는 모습을 보아도 온원보다 딱히 나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초보의 눈에 단지 그런 미묘한 차이를 구분해 낼 능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당시 온투가 걸음마 단계였기 때문에 온투의 우수성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당시 온투를 추던 이들의 실력이 그리 높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온투의 첫인상을 그렇게 그다지 임팩트 없게 뇌리에서 잊혀져 갔습니다.
실제로도 바에서 온투 추는 사람은 늘기는 커녕 그나마 있던 사람도 사라져 가는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가 김동옥이라는 사람이 캐나다에서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수원에 살던 사람이라, 수원에서 온투 강습을 개설했죠.
당시 월등한 기량과 멋진 뽀대(^^;)를 선보이기에,
그 춤사위에 반해 당장에 수원엔 온투 열풍이 불었고,
저도 그 대열에 동참했죠.
(당시 서울에선 온투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습니다.)
뭐... 일단 온투를 배워는 놨고,
지금 막 배운 온투를 어떻게든 써먹고 싶어하는 살세라들 덕에 연습 상대도 충분했고...
어찌어찌 온투는 출 수 있게 되었지만...
역시나 출 상대가 많지 않기에...
또다시 온투는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온의 방한과 더불어 서울에서도 온투 열풍이 불더군요.
이번엔 과거의 경우와 임팩트가 달랐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월등한 기량의 해외 댄서가 엄청난 포스를 뿜으며 바에서 온투를 선보였고,
누구나 온투의 우수성, 아니, 온투 댄서의 우수성을 절감할 수 있었죠.
인스트럭터들도 오래지 않아 온투 댄서로 변신하여 온투 보급에 앞장섰죠.
(그 동기에 대해선 여러가지 말들이 많았습니다만... 차치하기로 하죠.^^)
동호회마다 온투 웍샵이 주최되었고,
상설 강습이 개설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때 나름 호황(?)을 맞았습니다.
제가 온투를 출 줄 안다는 것을 알자마자,
이제 막 온투를 배우기 시작한 살세라들의 연습 상대로 꽤 이리저리 팔려(?) 다녔죠.
당시 온투를 출 수 있는 남자는 인스트럭터급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제 막 온투 걸음마 뗀 여자들이 인스트럭터를 대상으로 연습을 할 순 없었으니까요.
나름 일시적으로 높아진 주가(?)를 활용하기 위해서
당시 불만의 목소리와 온투가 과연 필요한가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에 의도적으로 동참하지 않았죠.
사실 이런저런 이유로 남들보다 앞서서 온투는 추게 되었지만...
솔직히 그때까지도 전 온투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의혹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장서서 온투의 우수성을 역설하는 것까진 차마 못 하겠더군요.
(제 성격상, 제 머리속으로 납득하지 못 하는 것에 대해 역설하는 것은 도저히 못 하겠더라구요.)
단지...
온투를 배우면 좀 더 부드러운 온원 스타일을 갖게 된다 정도로만 얘기를 한정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서야 이해하기를... 이는 온투의 특성이 아닌 단순히 뉴욕 스타일의 특성이었습니다.)
전 역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뭐든지 유래를 찾아 들어가길 좋아하죠.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시간순으로 연대기적인 서술을 주로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전 온원과 온투의 유래를 좀 더 깊이 알아봐야겠다 하고 자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온원과 온투를 얘기하기엔 제 지식이 너무 얕았거든요.
이미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온원과 온투가 만들어진 순서를 보자면...
온투가 훨씬 오래 되었고, 온원은 비교적 최근에서야 그 형태를 갖췄습니다.
하지만 온투가 우리나라에서 유행할 당시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정 반대로 이해했습니다.
온투가 온원의 좀 더 발전된 형태로 최신(?) 스타일이다라고 말이죠.
쿠바가 공산화 되면서...
공산 국가의 특징인 유물론적 세계관 덕에
제일 크게 타격을 받은 사람들 중 하나가 예술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상당수가 쿠바를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생활 기반이 없는 이들은,
미국의 빈민가에서 뒷골목 댄서로 일하거나,
푸에르토리코 자치지구에 유입되어 역시 직업 댄서로 변신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대공황이 찾아오죠.
이 시기의 미국인들은 고단한 삶의 탈출구로 춤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에 발맞추어 경제사정이 악화된 푸에르토리코인들이 미국 각지로 퍼지게 되고,
단지 춤을 보여주며 돈을 버는 댄서만으로 수입이 부족하자,
여유 시간에 춤을 가르치는 것을 부업으로 삼게 되었죠.
오래지 않아 아예 전문 댄스 선생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마침 지리한 대공황 직후의 경제 부흥기에 발맞추어,
살사가 대유행을 타게 된 것이죠.
온원 스타일이 만들어진 것은 이 시기였습니다.
원래 온투였던 살사는...
초보자가 배우기에 그리 녹녹한 춤이 아니었습니다.
빠른 비트의 8박자를 정확히 인지하여 춤을 추기엔 춤을 등한히 하며 노동과 더불어 살아온 미국의 일반 시민들도
우리나라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반인이 배우기 쉬운 온원 스타일이 생겼습니다.
온원이 어떤 계기로 개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원이 알려지지 않습니다.
어떤 창조적인 댄서가 쉽게 스텝을 밟을 수 있도록 개발했는지,
원래 변화무쌍한 스텝을 가진 라틴 댄서의 어떤 스타일 중 하나가 온원으로 발전한 것인지...
아니면 춤을 배운 강습생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하게 소화해 내다가 잘 못 소화해낸 것이
어느새 유행이 되어 버린 것인지...
(아메리칸 스윙이 비슷한 스텝을 갖고 있었으니까, 이와 섞여 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하간...
온투보다 월등히 쉽게 배울 수 있는 온원 스타일이 생겼고...
춤을 가르치는 댄스 교사 입장에선
굳이 강습생들이 소화를 못 해 내서 수강을 포기하는 온투 스타일보다는
쉽게 배워서 쉽게 추는 인기 좋은 스타일을 계속 가르칠 수밖에 없었을테지요.
여하간 온투가 뉴욕의 일부 지역에서 일부 사람들만 추게 된 것에 반해,
온원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배우기 쉽고 쉽게 출 수 있다는 것이 주효했겠죠.
온원 스타일이 생기면서, 그 이전엔 단순히 맘보 스텝, 살사 스텝으로 불리던 스텝이
온원과 구별하기 위해 온투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용어 설명. ^^
지금까지도 살사와 맘보라는 용어는 여전히 혼용되어서 사용됩니다.
사실 쿠바에는 의도적으로 살사라는 용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맘보는 40년대 초반에 만들어져 40년대 후반과 50년대 초반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음악입니다.
당시 모 맘보 밴드 중 하나가 음악을 연주하는 중간에 '살사!'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라틴 음악을 듣다 보면 일종의 추임새에 해당하는 호령이 자주 들어가는데, 그 중 하나였지요.
좀 더 매콤하고 맛깔스럽게 음악에 몸을 맡기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유행이라는 것의 생리에 맞춰, 시간이 지나며 맘보가 쇠퇴하게 됩니다.
물론 맘보 연주자는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만...
유행이 지난 후의 그들은 과거의 영광을 곱씹는 늙은 연주자에 불과했죠.
그러다가 80년대에 쿠바의 모 레코드사가 맘보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유행 지나서 식상한 음악을 재탕한다는 편견을 우려하여,
맘보라는 이름 대신 전혀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살사라는 명칭이었고, 이 시도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즉, 맘보와 살사는 원래 같은 장르의 음악인 것입니다.)
사람마다,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경우가 있고, 새로운 것을 선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을 간간히 접한 사람의 경우엔 그것과 차이를 구별하지도 못하겠는데 새로운 것이랍시고 튀어나오는 것보다,
아예 익숙한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접근하는 것이 더 받아들여지기 쉬운 경우가 많죠.
그래서 살사라는 이름으로 맘보가 부활한 이후,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각각 다른 이름으로 시장을 공략했습니다.
또한 늙은 연주자들의 아집도 한몫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던 맘보라는 음악을 차용해서
살사라는 이름으로 재포장하여 팔아먹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던 듯 합니다.
때문에 기필코 살사라는 이름 대신 맘보라는 원래의 이름을 고집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과거 늘상 맘보를 접해왔다가 식상해져 있는 쿠바의 젊은 층은 살사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였고,
이미 완전히 몸에 베어서 그 리듬을 뼈속 깊이 사랑하는 쿠바의 나이 든 세대는 맘보라는 이름을 고집했습니다.
그리고 과거 간간히 들어왔던 향수 어린 음악을 다시 접하게 된 미국의 경우엔 맘보라는 이름으로,
젊고 개척적인 푸에르토리코인들 역시 새로운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미국에서 살사라는 이름을 활용합니다.
때문에 쿠바는 쿠바 나름대로의 이유로 맘보와 살사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미국은 미국 나름대로의 이유로 맘보와 살사라는 용어가 혼용됩니다.
라틴 음악은 음악과 춤이 쌍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춤 역시도 맘보와 살사라는 용어가 혼용되게 되었죠.
맘보와 온투가 동급으로 인식되게 된 것에는 에디 토레스라는 존재가 한몫을 하게 됩니다.
에디 토레스는 물론 당대 가장 걸출한 댄서이기도 했지만,
그가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맘보 연주자를 소재로 한 맘보킹이라는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입니다.
혹은 맘보킹 영화 자체가 에디 토레스의 삶을 소재로 했다는 말까지 떠돌았죠.
사실 당시 에디 토레스는 자신을 맘보 댄서가 아니라 살사 댄서라고 지칭했다고 합니다.
(다양한 스타일의 살사 온투 스텝들 중, 자신의 온투 스텝에 대한 것을 도식화하여 강의할 정도였죠.)
하지만 살사라는 것의 존재를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좀 더 어필하기 쉬운 맘보라는 용어가 사용된 거죠.
영화를 통해 일반인에게까지 알려진 에디 토레스는
자신을 맘보킹이라고 부르는 칭호를 상업적으로 유리하기에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무리 그 바닥에선 유명하다지만, 여전히 직업 댄서들의 생활은 풍족하지 않기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선
역시 일반인들 사이로까지 시장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맘보킹은 온투의 대표주자가 되었고,
그의 온투 스타일은 뉴욕 스타일의 전형이 됩니다.
자, 다시 온원 살사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원래 온원이 쉽게 배우기 위해 창조된 스타일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저변인구가 늘어감에 따라 점점 복잡한 스타일로 변모해 갑니다.
게다가 원래 일반인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스타일이다 보니,
일반인에게 어필하기 위해 아크로배티과 같은 현란한 쇼적인 기술이 많이 가미되게 됩니다.
이는 아크로배틱을 주요 기술로 하는 스윙의 영향도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온원은 단 4박자 안에 액션을 끝내야 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그루브한 동선을 그리며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피겨에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였고,
강렬하고 단편적인 피겨 위주의 춤으로 그 스타일을 정착시켰습니다.
그 후로 꽤 시간이 흘렀고...
살사가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 시기와 비교해도 전 세계는 경제적으로 많이 윤택해졌습니다.
온원은 쉽고 빠르게 배워 춤 출 수 있기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습니다만,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춤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살사는 언제 어디서든 쉽게 접할 수 있는 춤이 되어 버렸습니다.
당장 수강생을 붙잡아서 지속적으로 당근을 던져줘야만 생계가 유지될 정도로
댄스 강사들의 처지가 곤궁한 시대도 아닙니다.
극소수의 댄서들만이 제대로 된 온투를 출 뿐,
대다수의 초심자들은 박자와는 결별(?)한 채 일단 플로어 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황홀해 하는 것이
바의 일반적인 분위기인 시대도 아닙니다.
즉, 이제 온원의 결정적인 장점은 과거에 비해 많이 희석된 상태인 것입니다.
감각적이고 열정적인 것에 열광하여 밤낮 없이 단시간 내에 살사를 발전시킨 주역들이,
정작 제일 먼저 이 살사의 단순함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좀 더 색다르고 더 감각적이고 심오한(?) 것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죠.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추는 춤인 온원의 오리지날판인 온투를 발견한 것입니다.
온투의 대두는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이미 온원을 출만큼 춘 사람에 한정된 이야기일까요?
온원이 대두되던 시절의 이야기를 수집해 보면...
당시 살사의 일반적인 강습 형태는...
대략 일주일 내에 한 클래스의 강습을 끝내는 형태라고 합니다.
보통은 단 하루만 배우고 플로어에 나가서 춤추는 사람이 대다수였다고 합니다.
당장 춤 추고 싶어서 댄스 교습소를 찾은 사람들에겐
몇달동안 지루한 강습을 듣고 연습을 반복해야만 춤을 출 수 있다고 하면
십중팔구 수강을 포기하겠죠.
그래서 댄스 강사들은 거의 대부분 왕초보 강습만 반복한 셈이 되겠죠.
극소수의 댄서 지망생들만이 체계화된 커리큘럼의 강습을 들을 수 있었다는군요.
어차피 대다수가 그런 식으로 박자는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춤을 추다 보니
굳이 경쟁심도 없었고, 열등감도 없었죠.
물론 박자 틀리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겠죠.
바에 나와도 대부분의 경우 술 마시고 음악 들으며 얘기하다가 간간히 플로어에 나가서 가볍게 춤을 추는 것이 고작이었구요.
(쿠바인들이 주로 출입하는 바의 경우엔 분위기가 달랐다고 합니다만...)
하지만 최근의 살사는 화려한 피겨가 많이 선보이는 춤을 주로 춥니다.
어쩌다가 하루 속성으로 배워서 한두곡 추고 바를 나서는 사람들이 오히려 소수가 되었죠.
때문에 살사를 추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전문 교습소에서 장기간 체계적으로 살사를 배웁니다.
현재의 미국식 살사가 유행하는 나라나는 모두 마찬가지겠죠.
미국이든 우리니라든 어디든 마찬가지입니다.
즉, 온투 강습이 초창기 가졌던 난제는 기본적으로 해결된 상태에서 출발한다고 봐야겠죠.
이런 상황이니...
배우는 사람 입장에선 조금 더 어렵다 쉽다로
온원 강습이냐 온투 강습이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졌죠.
조금 더 어렵다고 해도 몇달이나 되는 교습 기간은 이를 커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요.
어차피 온원이 유행한 것도 필요와 대세를 따라서입니다.
때문에 똑같은 논리로 온투가 유행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온원이 유행하면 또 대세가 바뀌겠죠.
온투가 처음 들어온 것은 온원에 식상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입니다.
똑같은 이유로 나중에 온투에 식상한 사람들이 온원을 들여올 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필요의 흐름에 의한 것이고,
굳이 모종의 당위성을 들어서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르다라고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 보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기심의 발로로 대세를 거슬러서 왜곡된(?) 흐름을 만들려고 시도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어필하지 못하면 어차피 도태되게 되어 있습니다.
혹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이 성공해서 결국 그쪽으로 대세가 변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진리라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한 것이니까요.
P.S. 한가지 정정할 것이 있네요. 쿠바 공산화와 미국의 대공황과의 선후 설명이 반대가 되었네요. ^^;;
하지만 글 문맥엔 그리 큰 영향 없으니 일단 그냥 냅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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